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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완 수 박사
산업보안학 박사. 명지대학교 법무정책학 객원교수. 보국훈장 광복장 국가유공자
저서 : 국가 사이버안보 구축 전략에 관한 연구.
국혼이 담긴 신비스러운 대한민국 무궁화 등
‘광복절’을 맞이해 일제 강점기 ‘무궁화 수난의 역사’를 되새겨 보자 !
‘우리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무궁화를 바로 알자’란 기사에 이어 광복절을 맞이해 일제강점기에 수난을 겪었던 무궁화 유례를 살펴보고 우리 후손들에게 다시는 뼈아픈 상처를 대물림해서는 안된다는 차원에서 재조명하고자 한다.
무궁화가 최초로 문헌에 기록된 것은 1700년 경 중국산해경(진나라 곽박 저서)에 군자국유훈화초조생모사(君子國有薰華草朝生暮死)란 기록이다. 이후 지봉유설(광해 6년 1641년)에는 군자지국지방천리다목근화(君子之國地方千里多木槿花)란 예찬이 나오며 해동역사(이조 정종 1776∼1800)에는 당 현종이 신라를 군자지국이라 하였고, 고려 예종 때 고려를 근화향(槿花鄕)이라 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군자의 나라’라고 하여 사람들의 민족성이 군자답다고 하여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의상을 하얀 무궁화를 닮아 아름답게 피어나는 민족이라 예찬함으로써 우리 국토를 무궁화 삼천리 금수강산으로 상징하였다고 한다.
1935년 동아일보의 ‘조선의 국화, 무궁화의 내역’이란 제하의 기사를 보면 당시 신문화가 들어옴에 따라 서양인의 왕래가 빈번하였고, 윤치호 선생의 발기로 양악대가 조직 되어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애국가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을 사용함으로써 무궁화는 조선의 국화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무궁화를 뜰에 심는 것조차 일인관리들이 싫어하였고 반역죄처럼 다루었으나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노예 같은 생활을 해오는 동안 무궁화에 대한 애틋한 사랑은 우리마음 속 뿌리 깊이 자라왔다.
이런 수난을 겪을 당시 한서 남궁억 선생(1910년 배화학교 교편)은 강원도 홍천 보리울에서 청소년들에게 한국 역사를 가르치며 무궁화 묘목을 다량으로 길러 이를 널리 보급하여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과 용기를 일깨워 주신 분이었다.
한 때는 진달래꽃을 국화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진달래꽃은 북한에서 국화로 정하고(현재는 목란의 꽃) 우리 무궁화는 벌레가 많이 생긴다 하여 비판과 천대 속에 수난을 겪어
왔던 것이다.
지난 호에서 밝혔듯이 현재 지구상의 무궁화는 270여 종으로 배달계, 단심계, 아사달계로 구분하고 이중 우리나라의 토종 무궁화인 백단심 무궁화는 일제 문화말살 정책(총독부 3대 사이토)에 의해 거의 잘려나갔고 백단심 무궁화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트려 민족의 귀를 어지럽혔는데
첫째, 꽃이 지저분하다(진딧물), 둘째, 꽃을 보면 재수가 없다(유언비어), 셋째, 꽃가루가 눈에 닿으면 눈병을 얻는다(약이 없다) 등등, 우리 스스로 낫을 들고 무궁화를 잘라버린 아픈역사도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이 우리의 ‘얼과 혼’을 말살하려고 하얀 무궁화인 백단심 무궁화를 모두 뽑아 버리고 가시 돋친 탱자 나무를 심게 하였다.
일본은 하얀 무궁화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소나무도 없애 버렸고 정기가 흐르고 운기가 좋다는 산 기슭마다 쇠말뚝을 박는 등 우리 민족의 혼을 상징하는 것들을 다 없애버려 우리 민족의 중심의 힘을 잃게 하는 등 그 만행은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다.
다행인 것은 광복과 더블어 입법, 사법, 행정 3부의 표상으로 무궁화가 사용되었고, 국기의 봉도 무궁화꽃 봉오리로 제정, 명실 공히 우리의 꽃으로 오늘날까지 자리를 지켜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백단심 무궁화는 유색 무궁화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첫째, 모든 유색 무궁화는 꽃이 질 때 꽃잎이 따로따로 지고 서쪽으로 행해지지만 하얀 무궁화인 백단심 무궁화는 유일하게 통꽃으로 지고 동쪽을 향해 진다는 것이다.
둘째, 백단심의 하얀 꽃잎은 우리 백의 민족의 흰색을 의미하며 흰색은 눈부신 빛의 색깔로 배달민족(빛의 백성)을 뜻하기도 하다.
셋째, 백단심 무궁화는 유색 무궁화와 달리 인시(새벽 3∼6시)에 이슬을 먹고 활짝 핀다.
넷째, 백단심 무궁화의 씨앗을 보면 태극모양이다. 태극기의 태극은 이 무궁화 씨앗을 모델로 만든 것이다.
다섯째, 무궁화는 7월초순∼10월 중순까지 핀다. 그 중 오십일 째 되는 날이 광복절이다. 백일기도와 같이 백일 기간에 의미를 두는 일들은 무궁화 꽃과 관련이 있다. 단군신화에서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백일간 인내하면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도 이 하얀 무궁화인 백단심 꽃이 백일 동안 피고 나서 열매를 맺는 것과 일맥 상통하는 신화이다.
이러한 숭고한 정신이 담긴 무궁화로 집집마다 담쟁이 넝쿨처럼 집과 집의 경계를 단장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심겨져 왔던 무궁화를 일제 때 모두 뽑아 버렸던 것이다.
무궁화가 우리 민족의 설계도라고 할 때 수많은 세월 동안 갖은 시련을 혹독하게 겪으면서 진시황 때 이르러 남북이 오만 리, 동서가 이만 리가 되었던 광활한 영토는 물론, 우리 동이민족의 대부분을 진시황의 진나라에게 빼앗긴 것이다. 그 후 수많은 외침을 받아오다가 말년에는 일제의 만행에 의해 영토 뿐만 아니라 민족의 주권마저도 완전히 탈취 당하는 고초를 겪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독립투사들에 의해 우리의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던 것이며 오늘날에 이르러 그 옛날의 빛을 회복하는 민족의 혼을 불러 일으켜 우리의 주권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백단심 무궁화가 이 땅위에 만발하도록 하여 다시는 과거에 겪었던 아픔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온 국민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