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시 향토유적 제16호
선성군파 이극심 4형제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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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호국의 달이다. 우리고장에는 먼 옛날 어떤 일이 있었을까. 옛 양주(현 의정부 고산동)를 지키려고 순국한 선성군파 이극심 4형제의 이야기가 있다. 현 의정부시 고산동에 소재하는 선성군파 명산도정 종중 묘역에는 4형제 이극담, 이극성, 이극함, 이극겸의 동혈 합장묘가 있는데 이들은 7년간의 임진전쟁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이다. 이들의 활약은 임진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적으로 임진왜란전의 기록은 불에 타 소실 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현재 남아있는 기록이 많지 않다. 잘 알려진 춘추관일기, 승정원일기를 포함해 4대사고중 전주사고만 제외하고 전부 소실됐다. 또한 4형제의 부친 이염에 대한 기록은 순절 외에는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여러 자료를 참고했다.
1592년 임진왜란(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 1597년 2차례 조선을 침략) 당시 일본군은 부산의 동래성을 공격해 함락시킨 후에 차례대로 충주와 상주의 조선군을 격파했다. 조선임금인 선조(1567~1608)는 의주로 피난길에 올랐으며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북상하던 일본군을 맞아 전국의 의병들이 왜구에 항쟁했다. 그러나 전세는 밀리고 있었으며 중요한 전선인 임진강 방어선은 5월 17일 패배했다. 마침내 5월24일에 옛 양주지역(현 의정부시 고산동)에 침입한 일본군을 맞아 선성군파 4형제는 우리 고장을 지키기 위해서 전투에 참여했다.
일본군은 가토의 2군 별동대가 포천일대를 장악하며 한양인근의 연락선과의 보급을 위해 길목인 송산의 인근에서 이동 중이었다. 이들은 양주지역으로 돌진하였으며 이극심 4형제는 왜군과의 격전을 벌이게 된다. 치열하게 항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수적인 열세와 무기 등의 힘의 차이에 의해 패배했다. 결국 형제가 나란히 같은 장소, 같은 날, 같은 시간에서 순절하고 만다.
4형제는 선성군의 현손이자 명산도정 금정의 증손이기도 하다. 4형제는 왜군과 전투 중에 형세가 불리하고 패색이 짙어지자 죽을 결심을 하고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흐르는 피로 옷깃에 사필명백(死必明白)이라 새겼다. ‘내가죽을지언정 내 뜻은 분명하다’는 혈서를 쓰며 분투하였으며 그들의 나라를 위한 장렬한 죽음은 후손들에게 오래도록 전해진다.
한편 4형제의 묘역이 현재까지 보존된 것은 산지기 홍희 덕분이다. 홍희는 후손 묘역을 돌보던 일을 하였는데 그는 4형제가 순절하자 시신을 수습했다. 전쟁 같은 국가적인 대위기의 혼란속에서 현장을 이탈하거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가지 않았으며 홍희는 4형제의 시신을 수습하였기에 현재까지 묘역이 보존될 수 있었다. 종중들은 이 산지기 홍희의 충심을 가상히 여겨 작은 단에 추모비를 만들었다. 묘역에 방문하면 홍희의 추모비에 일배주를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그의 충성을 기린다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또한 고산동 이극심 4형제의 묘역은 동혈(同穴), 동분(4同墳)묘로 합장해 이루어졌다. 이외에 하트형 부부묘, 부부종렬묘, 전후좌우 혼합묘 등 다양한 묘역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국난에 처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순신, 권율, 김시민 등 많은 구국영웅들이 있지만 정작 우리 고장 의정부를 지키다가 순절한 많은 이들을 잊고 지낸 것은 아닐까.
김진녀 기자